3.15 부정선거

2011. 12. 3. 23:20MY SPACE/The Others

반응형

부정선거 전날(3월 14일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고, 당일에는 돈을 주고, 한 사람이 투표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감시하고 야당인 민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등의 부정이 있었다. 이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3·15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3]
 

개표 과정 중에는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표가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으며[4], 결국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로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5] 그리하여,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는 사태로 이어지었다.[6]

선거 이후 
1960년 3월 16일마산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3·15 마산시위)가 발생하였으며 계속 일어나 계엄령까지 선포되었고, 곳곳에서 학생들이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승만의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 치고, 1960년 4월에,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이것이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출처 : 위키백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