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태 고문 별세, 빈소 현황과 약력, 고문 회고

2011. 12. 30. 17:47MY SPACE/The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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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정당인, 전 국회의원
출생-사망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 - 2011년 12월 30일
소속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가족
배우자 인재근
학력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경력
2011.12~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0.08 우석대학교 석좌교수
사이트
블로그미니홈피



이하 : 위키백과사전 http://goo.gl/CUSUr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196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60년대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9월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23일간 안기부[1]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을 받았다.[2][3][4]

1996년부터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 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2][5] 뇌정맥 혈전증과 2차 합병증으로 2011년 12월 30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였다.[6]


 

본인은 1985년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 그 다음에 9월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9월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 (중략) ...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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